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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학보 第129號.jpg
KCI등재 학술저널

服齋 奇遵의 정치 활동과 己卯八賢으로서의 위상

Gijun’s political activities and status as the Eight Wise Men of Gimyosarim

DOI : 10.52557/tpsh.2024.129.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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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기묘사림의 일원이었던 복재 기준의 정치 활동과 伸冤 상황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기묘사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한 연구이다. 복재 기준은 관직 생활 대부분을 홍문관에서 지냈던 엘리트 관료였다. 기준은 신씨복위소 사건에서 조광조와 함께 언로 보호론을 제기하며기묘사림의 결집에 일조했다. 또한 경연관으로서 至治의 구현과 개혁 실현을 꿈꾸며 중종을 輔導했다. 기묘사화를 맞아서는 핵심 인사 8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가, 김식의 망명과 안처겸의 옥사로 추죄되어 絞死되었다. 신원은 기묘사림 가운데 가장 늦었지만, ‘기묘팔현’으로 추앙되었다. 기준은 청요직 관료로서 至治를 추구했는데, 이는 기묘사림 대분분에 해당한다. 기묘사림은 특정 계보에 소속된인사들이라기보다는, 신씨복위소 사건을 계기로 도학정치에 대한 강한 지향 속에 결집한 청요직 관료들이었다. 비록 기묘사화로 실각했지만 사대부 사회에서는 조광조 뿐만아니라 기묘사림을 士의 모범으로 추앙하며, 도덕적 정치 질서의 확산을 위한 자원으로 활용해 나갔다.

This paper is a study that examines the political activities and posthumous reinstatement process of Gijun, who was one of the Gimyosarim. Gijun was an elite bureaucrat who spent most of his government career in Hongmungwan. In the sinssibogwiso case, appeal requesting the reinstatement of the deposed Queen Sin, Gijun raised the argument for press protection together with Jo Gwang-jo, contributing to the gathering of Gimyosarim as a political force. Also, after taking power, he dreamed of the realization of Jichiui(至治) and taught King Jungjong as a Gyeongyeongwan. He was named as one of the eight key figures in the Gimyosahwa, and was exiled, and then killed for additional crimes. After his death, he was revered as one of the ‘Gimyo-palhyeon.’ The Ginmyosarim were elite bureaucrats who gathered together in pursuit of the realization of the Jichiui(至治) in the wake of the sinssibogwiso case. Even though Gijun and Ginmyosarim were deposed, they were revered as exemplary men in the noble society and used as assets for the realization of moral political order.

Ⅰ. 머리말

Ⅱ. 愼⽒復位訴

Ⅲ. 至治의 추구와 개혁에 대한 압박

Ⅳ. 被禍와 己卯八賢으로의 현창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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