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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탐구 제47집.jpg
KCI등재 학술저널

금산사와 후백제

Geumsan Temple and Later-Beakje

DOI : 10.35160/sjekh.2024.8.4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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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북 김제에 위치한 금산사와 후백제 사이의 관계를, 935년 신검의 견훤 유폐 사건을 매개로 살펴보기 위한 시도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대 창건된 절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신라 중대의 경덕왕 대에 활동했던 ‘백제인’ 진표가 이 절에 주석하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진표를 백제인으로 소개한 것은 오월 출신의 승려 찬녕이 쓴 『송고승전』이다. 오월과 후백제는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인식은 후백제로부터 비롯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산사는 고대사의 전개에서 ‘백제적 맥락’이 부여된 공간인 셈이다. 후백제는 왕조 말기에 왕위계승 문제에 휩싸였다. 이에 935년 3월, 견훤의 장남 신검은 부왕을 금산사에 구금함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적장자인 자신이 왕위계승 문제에서 외면된 것이 이 유폐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인 것이다. 물리력을 동원해 획득한 권력이었으므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신검 정권으로서는 부왕의 공식적인 추인을 받음으로써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직 후백제에서만 통용되는 ‘제한된 인식’이기도 한, 금산사에 투영된 ‘백제적 맥락’에 주목한 신검은 백제의 상징과도 같은 견훤을 이곳에 가두고, 그로부터 ‘백제 계승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정통성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돌연 고려로 투항해버렸고, 한 순간에 백제의 정통을 상실해버린 후백제의 신검 정권은 이로 인해 발생한 난맥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였다.

This article is an attempt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Geumsan Temple(金山寺) and Later-Baekje(後百濟). Geumsan Temple is known as a temple founded during the reign of King Beop(法王) of Baekje. And when Jinpyo(眞表), a ‘Baekje person(百濟人)’ who was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Gyeongdeok(景德王) of Silla, became a monk at this temple, the temple expanded greatly. The introduction of Jinpyo as a ‘Baekje person’ is in Songgaosengchuan(宋高僧傳) written by Zanning(贊寧), a monk from Wuyue(吳越) during the Song(宋) Dynasty. Wuyue had a close relationship with Later-Baekje. So this kind of perception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Later-Baekje. Therefore, Geumsan Temple was continuously referred to as such at least within Later-Baekje due to its connection with ‘Baekje.’ Later-Baekje was embroiled in a problem of succession to the throne at the end of its dynasty. Accordingly, in March 935, Shingeom(神劍) made the extreme choice of suddenly confining his father Gyeonhwon(甄萱) in Geumsan Temple. He wanted to solve the problem of succession to the throne by using physical force. In other words, it is fair to say that the eldest son’s neglect of the issue of succession to the throne was the direct cause of this confinement incident. Since the ascension to the throne was done through an unusual method, Shingeom whose legitimacy was weak hoped to break through the chaos by receiving Gyeonhwon’s official approval. Shingeom, who took note of the fact that Geumsan Temple had experienced history through Baekje, wanted to resolve the issue of legitimacy by imprisoning Gyeonhwon, who was like a symbol of Baekje, there and having him officially recognized as the ‘successor of Baekje’. However, Gyeonhwon suddenly surrendered to Goryeo, and the Shingeom regime of Later-Baekje, which lost the legitimacy of Baekje in an instant, failed to overcome the resulting chaos.

Ⅰ. 머리말

Ⅱ. 고대 금산사의 백제적 맥락

Ⅲ. 신검의 견훤 유폐와 금산사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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