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의 민족운동은 1903년 청남학교 설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청남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하였고, 청신여학교에서도 여학생을 교육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자금 지원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에는 3·1만세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가 조직되자, 충청북도 독판부 참사로 활동하며, 군자금을 보냈다. 또한 그는 대한국민총회가 조직되자 충북대표로 평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청주청년회활동을 하였고, 같은 시기 교회에서도 면려회를 조직하여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는 1925년에 충북도내 무자격 교원을 도태시킨다는 명분으로 그를 청남학교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그가 청주청년회를 이끌 당시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이념 대립이 불거질 때, 일제는 ‘망선루 기부금 횡령사건’을 조작하여 그의 청년회 활동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자, 그는 신간회 청주지회 활동을 다시 주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은 지속되었다. 신간회 청주지회에서 김태희가 강연을 하자, 치안법 방해로 검속되기도 하였다. 아쉽게도 신간회는 1931년에 이념을 벽을 넘지 못한 채 자체 해소되어 그의 활동도 사라졌다. 게다가 그의 교회활동도 일제의 정교분리정책이라는 명분아래 교회에서 종교적인 행사만 하도록 강요당하였고, 신사참배까지 수용하도록 강요받자, 그는 교회활동도 그만두고 청주를 떠나 신탄진으로 갔다. 그는 그곳에 가서도 야학을 운영하다 60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태희는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하는 교육가였고, 청년들과 시민들을 계몽시켜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계몽운동가였고,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김태희의 민족운동의 의의는 첫째, 근대 교육에 앞장섰고, 둘째, 청주의 근대화에 앞장섰고, 셋째,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넷째,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냈다. 또한 민족운동에도 한계점은 있다. 교회와 연계한 민족운동을 펼치다 보니 국내 활동에 국한되었고, 다양한 투쟁을 펼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한 특정한 세력과 사상에 치우친 나머지 광범한 사회계층과의 연대가 이뤄지지 못한 점도 한계였다. 그러나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김태희는 한말부터 1920년대까지 청주의 근대를 이끌며, 특히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선각적 인물로 평가하여 마땅하다.
Kim Tae-Hee was born in 1877 in Tap-dong, Cheongjumok as the only son between his father Kim Dong-hyun and his mother from Jeaonju Lee family. His name is InWhan. Tae-Hee is called after be an adult. His penname is Ilseok. His national movement began with the establishment of Cheongnam School in 1903. He also taught female students at Cheongshin Girls' School, and in 1909 he did his activities as a member of the United Young Men's Party. In the same year, he served as the first president of the Youth Association in Cheongju-eup Church and supported the national education movement of Cheongnam School. He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in 1919, and when the secret contact network of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organized, he was in a posi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group in Chungcheongbuk-do Province and also sending war funds. Also, when the Korean National Assembly was organized, he was elected as a councilor of representatives of Chungcheongbuk-do and doing the activities. In 1920, he did activities in the Cheongju Young Men’s Association, and during the same period, he organized the Christian Endeavor Society at church and continued social enlightenment movement. When Singanhoe (New Trunk Association) was organized, he took the lead of the activities of Cheongju Branch of Singanhoe and presiding anti-Japanese movement. In 1931, Singanhoe was dissolved, and when his church accepted to do shrine worship, he left Cheongju and moved to Sintanjin. At his age of 60 in 1936, he departed from the world without seeing his country's independence. Kim Tae-Hee was an educator who provided ‘National Education’ to students, and was an enligtement activist through the enlightenment of students & citizens, an independence activist who tried to obtain independence from he Japanese Colonial Rule. The significance of Kim Tae-Hee’s National Movements are as follows: First, he led the efforts to provide modern education to the students. Second, he was a leader in the modernization of Cheongju. Third, he was at the forefront of the anti-Japanese Movement. Fourth, he had successfully kept his values and beliefs until the end. There were also some limitations to such ‘National Movements.’ Since most activities took place in connection with the church, it was limited to domestic activities and failed to expand its influence to various fields. Also, because the movement was biased towards certain groups and ideologies, it failed to create a meaningful connection with the mass public. However, despite these kinds of limitations, Kim Tae-Hee deserves to be regarded as a visionary pioneer who led the modernization of Cheongju from the late 19C to the 1920s, and as a figure who stood at the forefront of the National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Ⅰ. 머리말
Ⅱ. 민족운동의 배경
Ⅲ. 한말의 국권회복운동
Ⅳ.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