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선 초기 정치이념의 전환과정에 내재되어 있었던 신유학과 불교 사이의 이념적 긴장을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주제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한편으로는 성리학자들이 제시했던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이 세속성의 문제였다는 점을 간과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세속의 종교임을 항변했던 호교론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유불논쟁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양자간에 쟁점이 되었던 논쟁의 접점을 중심으로 한 비교연구가 필요하다.<BR>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의 척불론을 촉발시킨 것은 불교교단의 세속적 타력이었다. 따라서 불교계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 문제에 답변해야 했다. 그러나 교단의 지도자 기화(己和, 1376-1433)는 불교교단이 안고 있었던 현실적 문제점들을 외면했다. 단지 그는 보유론의 관점에서 불교와 유학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는 출세간을 지향하는 종교가 왜 세속의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지, 그리고 종교의 세속개입이 초래한 교단의 병리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의 유불논쟁은 세간과 출세간을 정합적인 체계로 구성한 신유학 측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 결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현세의 이념인 유학이 출세간의 영역까지 관장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담론으로 구축되면서 조선시대의 정치이념은 더욱 교조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Ⅰ. 서론<BR>Ⅱ. 불교의 성(聖)과 속(俗)<BR>Ⅲ. 여말선초의 척불론<BR>Ⅳ. 기화의 호불론<BR>Ⅴ. 결론<BR>참고문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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