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이야기하기’의 구술성에 대해 이해하려 하였다. 구술문화 속에서 자라난 구비설화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술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자 핵심으로 이야기하기의 구술성에 대해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두 가지의 접근법을 사용하였는데, 그 하나는 이야기가 구연되는 구체적인 이야기판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메타설화라 할 수 있는 <이야기 주머니> 설화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우선 이야기판에서 이야기하기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하기를 권장하는 이야기판의 여러 움직임에 관심을 두었다. 이야기판은 ‘이야기는 세 자리’, ‘돌려가며 이야기하기’, ‘주고받으며 이야기하기’ 등의 전략을 관습화하여 이야기하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야기판은 보다 정확하고 훌륭한 이야기를 선별하는 메커니즘보다는 보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보다 많이 구연되게 하는 이와 같은 관습화된 메커니즘을 통해서 부정확하거나 빗나가는 이야기들을 상쇄시키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사실 <이야기 주머니> 설화에서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이야기는 들으면 반드시 구연해야 한다’는 표면적인 주제의식과 이야기판의 이러한 이야기하기의 전략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도 ‘이야기하기’로 대표되는 이야기판의 이와 같은 활성화 전략들은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야기하기를 통해서 탄탄하게 형성된 이야기판은 이야기의 통합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판을 통해서 이야기들이 상호작용하며 교류하여 집단정신을 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이야기하기의 구술성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이다. 이야기하기의 구술성은 시대의 변화에 새로운 모습으로 적응해야만 했다. 다시 말하면 구술문화의 시대가 지나고 문자문화의 시대가 오면서 이야기하기가 갖는 문화적 위상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 주머니>는 이야기 문화의 주도권 상실을 이야기하면서도 이야기 혹은 구술문화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위상으로 다시금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을 진지하게 일러주는 문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 집단정신과 구술성
2.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3. 이야기판에서의 이야기하기
4. 문자문화와 구술문화의 동거
5. ‘이야기하기’의 구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