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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과 활동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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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김연수의 학력, 판소리 학습과 판소리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 혀 정리하고자 하였다. 그 동안 김연수가 서울로 유학하여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연 수의 친구였던 노희상의 증언을 찾아냄으로써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김연수가 한 문 공부를 한 것은 맞으나 신식 교육을 받은 바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14세(1920년)까지 9년 동안 한학을 공부한 다음 1935년 유성준으로부터 <수 궁가>를 배우기까지의 15년 동안에 김연수는 무엇을 했을까? 1942년에 김연수가 만들어 발매한 <아우를 생각코>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김연수가 유성준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전에 이미 소리를 배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 또 이경엽은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 인 판소리 수업을 받기 이전에 지방의 소리꾼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 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김연수는 유성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이전에 이 미 지방의 소리꾼들로부터 판소리를 배웠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연수는 본격적인 판소리 학습을 시작한 이래 유성준, 송만갑, 정정렬에게 배웠다고 하 였으나, 정응민으로부터도 많은 부분을 배웠다.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의 특징은 세세한 부 분까지 판소리 전승형을 익히는 방식이 아니고 사설과 장단을 위주로 하여 대강의 뼈대를 익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것이 후에 김연수 판소리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연수는 배운 대로만 소리를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소리나 신소설, 신재 효 사설 등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새로 판소리를 짰다. 그래서 김연수의 판소리는 이전의 판소리와는 전혀 다른 판소리가 되었다. 정정렬 같은 사람은 이를 ‘자작’이라고 하였다.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을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김연수의 해방 전 활 동을 대표하는 것은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김연수 자신은 1937년 조선성 악연구회 직속의 <조선창극좌>의 대표를 맡았다고 했으나, 이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조선의 일류명창 여섯 분’이라고 일컬어지는 등 판소리계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해방 전부터 김연수는 일부 창극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총 76면 에 이르는 음반을 발매했으며, 수차

1. 머리말 2. 김연수의 판소리 학습 3. 김연수의 판소리 활동 4.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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