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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시대의 보훈제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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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왕조는 건국초기에 開國功臣을 위시하여 국가와 왕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을 功臣으로 책봉하였다. 이에는 배향공신(配享功臣)과 훈봉공신(勳封功臣 또는 勳號功臣)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훈봉공신은 다시 정공신(正功臣)과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은 중국과 같은 분봉제를 채택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하에서 封爵制를 시행하였다. 이에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왕실봉작제와 공신을 대상으로 하는 공신봉군제를 시행하였다. 이들은 유교사회 최고의 존경과 명예를 독점하게 되었으며 현실적인 많은 특권들이 수반되었다. 조선왕조를 통하여 모두 28차례에 걸친 공신책봉이 있었다. 정공신은 3등으로 나뉘어 5~6인에서 100명에 이르렀고 그 등급에 따라서 각종 특전과 토지 · 노비 등이 차등 있게 賞賜되었다. 원종공신은 그 공이 정공신에는 미치지 못하나 다소의 공이 있는 자들을 대개 3등급으로 나누어 錄勳하였으며, 그 수효는 900여명에서 많게는 9,00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이들 공신들에게는 경제적, 사회적인 여러 가지 특권이 부여되고 핵심적인 정치권력까지도 장악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양반관료의 최상부에 군림하면서 막대한 특전을 향유할 수 있었다. 요컨대 조선의 보훈제도에 나타나는 중요사항을 정리해 보면 먼저, 조선의 보훈 업무는 조선왕조 창업과 함께 시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태조는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안정적 정치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 국가는 공신을 선별하고 운영하기 위한 보훈업무 담당기구를 설치하였는데, 보훈부서의 성격과 기능은 당신의 정치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즉, 건국초기의 공신도감, 충훈사는 왕조체제가 안정되고 기틀이 잡히면서 충훈부로 승격시켜 국가와 군왕에 대한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해 나갔다. 다음으로, 보훈부서의 강화와 약화는 국가의 주권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이후 의병들의 논공행상을 위하여 군공청을 설치하고 기존의 충훈부를 강화시켜 정부와 국민들이 단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체결된 갑오경장에서는 군국기무처의 제안에 따라 충훈부를 기공국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 때 격상되었던 표훈원의 기능이 약화되었던 것도 그 좋은 예이다. 끝

【 논문 요약 】

Ⅰ. 머리말

Ⅱ. 보훈업무 담당기구

Ⅲ. 공신의 종류와 책봉

Ⅳ. 공신 책봉에 따른 처우와 특권

Ⅴ. 맺음말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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