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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박태원, 대구지역 혼성합창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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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원(朴泰元, 1879-1921)이 작시하고 작곡한 「이별가」는 3절로 되었는데, 지금은 이 곡의 선율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시 불리어졌던 박태원의 자작곡 중 한 곡이다. 오히려 ‘켄터키 옛 집에 햇빛 비치어’로 시작되는 포스터가 작곡한 「켄터키 옛집」과 「클레멘타인」의 번역된 가사와 노래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곡의 가사번역 역시 박태원이 한 것이다. 박태원이 번역한 가사의 내용을 우리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박태원이 대구지역에 있어서 혼성합창의 선각자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역시 모르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그가 대구를 비롯하여 서울에서 끼친 영향, 곧 그의 음악적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다. 비록 박태원은 많은 업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당시 그가 활동하는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음악의 초창기였으며, 특히 대구에서 그의 음악활동은 처음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박태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대구에서 뿌린 서양음악의 씨가 결코 작지 않은 열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박태원에 대한 발자취를 추적해 보는 일은 대구지역 합창활동의 씨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박태원이 남긴 업적 중 외국곡의 가사번역ㆍ독창활동 그리고 혼성합창활동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특히 그가 활동한 시기는 서양음악이 차츰 우리나라에 알려지는 때이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박태원의 활동은 오늘날 대구지역 음악계에 큰 열매로 남아 있다. 그가 뿌린 작은 씨앗이 열매맺은 큰 결실은 쉽사리 부인할 수 없는 것임은 명백하다. 박태원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동생 박태준을 비롯하여, 1926년에 이중독창회를 가진 김문보, 한국양악사의 큰 별 현제명 등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짧은 생애를 살았고, 많은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재 박태원의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는 아쉬움이 앞서며, 앞으로 우리는 대구출신의 대음악가인 박태준ㆍ현제명을 비롯하여 ‘박태원’이란 이름 석 자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머리말: 가사번역과 혼성합창의 선구자

2. 박태원의 생애와 음악활동

3. 맺음말: 박태원의 선구자적 이해

참고문헌

국문요약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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