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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退溪와 日本과의 遭遇에 關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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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2. 퇴계에 대한 평가 3. 퇴계와 일본과의 만남 4. 퇴계학의 일본수용 5. 나오면서

본 논문은 퇴계학의 일본 수용과 퇴계와 일본과의 만남을 규명하고자

한다. 아울러 조선시대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당대의 최고 통치자인 임금

과 일본 에도시대의 유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연원(緣源)을 고찰하고

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퇴계는 일찍이 부친을 여인 어려운 생활 속에서

도 면학의 뜻을 져버리지 않고 6세에 천자문을 시작으로, 논어 등의 학

문 기초를 마련하였다. 34세에 관리가 되지만 그의 마음은 일관하여 근

직(勤直), 순수함의 꾸준한 학문전념으로 훗날 자신을 훌륭한 도학자로

거듭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확고한 기반 정착과 계

승․발전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성장하여서는 관리로서 현실정치의 영

달보다는 초야에 묻혀 소박하고 독실한 학문연구에 전념하고자 귀향하

여 도산서원을 일으켜 학문을 통한 입신출세와 명성추구보다는 자연에

묻혀 오로지 학문연구를 통한 인간의 감화와 내적 수양에 중점을 두면

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자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훈도하고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면서 단순한 지식만의 전수가 아니

라 인격적인 면에서 타인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진정한 스승의 면모를

보였다. 그러한 위대한 스승의 참 교육의 결과 퇴계 문하에서는 유성룡

(1542~1593)을 비롯하여 김성일(1538~1593), 정구(1543~1620) 등, 당대

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정치가와 학자가 배출되어 중앙의 관계에 큰

역할을 하면서 향리의 학문풍토를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퇴계의 온화하고 성실․정직․충직․삼감의 덕과 교양을

지닌 온전한 선비상은 많은 지식인들에게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에게도 선비로서 존중되어 왔다. 그의 인간됨과 높

은 학문의 명성은 조야에서 조차도 흠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 이제는

조선시대 한국을 대표하는 학자로 널리 알려진 그 연원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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