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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退溪의 前代學者들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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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退溪李滉(1501~1570)은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이고, 그 의 학문적 위상에 필적할 사람을 찾기 힘들다. 그는 평생 엄격하고 진지 한 자세로 학문을 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 퇴계학 파를 형성하여 우리 나라 學術史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학문에 대한 자세가 아주 엄격하였다. 퇴계에게 있어서 학문은 지극히 합당한 길을 찾는 하나의 여정이었다. 그래서 털끝만큼의 구차함 이나 바르지 않은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선배 학자라도 잘못되었 거나 부족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밝혀 말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아직 본격적인 학문이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았 기 때문에, 퇴계는 우리 나라의 학문을 정립한다는 생각에서 더욱 더 엄 격한 잣대를 갖다 대어 후세에 표준이 될 학문을 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학문 가운데서도 道學을 최고의 기준에 두고 선대 학자들을 평가했다. 佛敎나 老莊등 異端에 물든 학자는 가차 없이 貶斥하였다. 문학적인 업적이 대단한 孤雲崔致遠, 牧隱李穡등은 다 佛敎에 아첨한 사람이라고 비판하였다. 晦軒安珦등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배양한 공 로는 인정하지만, 道統을 계승했다는 愼齋周世鵬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圃隱鄭夢周, 寒暄堂金宏弼등은 학문적으로 인정하였지만 저술이 남 아 있지 않아서 평가를 할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 陽村權近은 견강 부회하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佔畢齋金宗直의 경우 道學 보다는 文學에 치중하였음을 아쉬워하였다. 靜庵趙光祖의 경우는 道學을 일으켜 후세에 학문이 일어나게 한 공 로는 인정하나 學力이 충실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너무 事功만을 앞세우 다 사화를 당했다고 평가했다. 花潭徐敬德은 학문이 깊지 못하면서 스스로 자랑하는 병통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理를 氣로 잘못 보는 문제가 있다고 했다. 退溪가 학문이 바르면서 깊이가 있고 저술을 남겨 후세에 전한 학자 는 晦齋李彦迪이라고 추앙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회재에 대해서 後 學이라고 하여 스스로 회재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퇴계의 평가는 기준을 높게 설정하여 선대 학자들에게 아주 엄격하게 적용하였는데, 그의 안목을 충족시킬 만한 전대 학자가 없었다. 본격적 이면서 전통적인 저술을 남긴 학자로는 오직 晦齋만을 인정했다. 퇴계는 자기 당대까지의

1. 서론

2. 우리나라 學術의 洞觀

3. 新羅時代學者에 대한 평가

4. 高麗時代學者

5. 朝鮮時代學者

6.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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