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133163.jpg
KCI등재 학술저널

퇴계의 비지문 연구현황과 과제

  • 33

일세를 대표하는 대학자의 명망을 얻었던 퇴계는 70 평생에 46편의 비지문자를 남겼다. 매양 비지 청탁을 끝내 사양하여 찬 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퇴계는 비문부작론자였다. 퇴계 는 「유계」에서 “비석을 쓰지 말라”고 말한 바 있다. 퇴계가 말한 비석과 비문은 신도비와 신도비명에 한정된 표현이다. 퇴계는 비 문과 갈문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썼다. 비문이 갈문보다 규모가 크고 내용이 상세해야 하므로 비문찬술은 노년의 처지에서 위기 지학을 지향했던 그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을 터이다. 퇴계는 갈문을 주로 찬술했는데 일정한 찬술원칙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고문의 격례(상격과 정법)를 존중하고 내용구성에 있 어 허사를 버리고 실록(實錄)을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퇴계가 갈문수사에서 중시한 대목은 ‘국촉’(局促)함이 제거된 ‘간 엄’(簡嚴)함의 추구였다. 비문보다 규모가 작기에 각자의 수효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갈문의 한계이다. 이같은 한계를 극복 해가는 길이 바로 ‘간결’함의 추구였는바, 이 역시 ‘엄격한 법도’ 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는 갈문을 써서 석면에 새 겨 넣을 때, 갈석의 공간처리에도 일정한 미학적 배려가 요구된 다고 보았다. 즉 ‘균제미(均齊美)’를 추구했던 것이다. 퇴계의 비지문 찬술태도는 한유와 구양수의 비지서사 방식에 기초해 있으면서 훗날 비지문의 전범을 보여준 농암 김창협에 의해 거듭 강조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 고문가들에게 하 나의 지침으로 작용했다. 향후 연구에서는 퇴계의 인간이해 태도 를 중심에 놓고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퇴계의 비지문에서 어떠 한 문학성을 운위하게 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을 배제하면서 차분히 중세시대의 고문수사론의 범위 안에서 치밀하게 검토되 어야 할 것이다.

1. 수전망조와 비지문자 2. 퇴계의 비지문자 찬술현황 3. 퇴계의 비지문자론에 대한 연구 성과 4. 퇴계의 비지문자에 대한 연구과제 참고문헌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