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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퇴계의 서원관과 조선후기 소수서원 講學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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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퇴계의 서원관이 조선후기 소수서원 강학 실제의 변화에 끼친 영향을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퇴계의 서원관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의 서원관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결국 소수 서원 강학의 실제를 규정하고, 그 결과 조선후기로 가면서 소수서원 강 학의 성격과 방식은 점차 변화를 겪게 된다. 이 글에서는 첫째, 주세붕 과 퇴계의 서원관의 차이를 살펴보고, 그 원인을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해석 방식의 차이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주세붕의 서원관은 ‘帝王 學과 治用論의 관점’으로, 퇴계의 서원관은 ‘講明道學을 위한 공부론의 관점’으로 규정하고, 서원관에 따른 강학의 차이를 검토하였다. 둘째, 주 세붕을 지나 퇴계에 이르러 주자의 서원 정신이 계승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서원 강학 이념을 확립하기 위한 퇴계의 노력과 실천을 검토하였다. 셋째, 18세기에 이르러 퇴계의 강학 이념이 소수서원 강학 실제를 구체 적으로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그 교육사적 의미는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하였다. 주세붕은 1542년 문성공 안향의 사묘를 짓고 이듬해 서원을 지음으로 써, 주자의 이념을 바탕으로 조선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창건하고, 서원 에 ‘제향과 강학’이라는 양대 기능을 확립하여, 교육기관에 순수한 교육 활동 지점으로서의 강학공간을 넘어, 일종의 道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제 향공간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서원은 ‘사묘에 부수적인 공간’으로 서, ‘강학처’보다는 ‘존현처’에 더 무게중심이 있었으며, 그는 당시 쇠퇴 한 관학을 대신하여 과거 공부를 통해 국가의 관리를 길러내기 위한 인 재 양성소처럼 서원을 인식하였다. 즉, 그는 서원을 ‘국가의 元氣’를 길 러내는 교육기관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주자학에 대한 주세붕의 고유한 해석 방식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는 진정한 儒道의 실현은 제왕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원을 통해 양성된 선비들은 그 제 왕학의 실현을 도와주는 인물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주세붕에게 서원 은 ‘국가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帝王學과 治用論의 관점에서 서원을 이해한 주세붕의 서원관은 17 세기 초반까지 소수서원 교육이 科業을 충실히 수행해내는 관학적 특성 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는 남송대

1. 서론

2. 주세붕의 서원관 : 帝王學ㆍ治用論의 관점

3. 퇴계의 서원관 : ‘講明道學’을 위한 공부론의 관점

4. 퇴계 講學 이념에 따른 조선후기 소수서원 講學의 변화

5. 敬讀 및 通讀 교재를 통해 본 조선후기 소수서원 講學의 心學的 특징

6.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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