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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후기 御札의 傳統과 『正祖御札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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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의 御札 활용은 통치술의 통상적 인 방법 중 하나였다. 조선전기 世宗이나 文宗 등이 어찰을 통해 현장에 있는 臣傑를 격려하거나 정책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런 傳統은 후대로 이어져 宣祖나 光海君, 孝宗, 肅宗 등이 대내외적 복잡한 정치 환경에 처하여 이를 打開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활용하였다. 正祖어찰의 활용 역시 이 같은 선대왕들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한편 肅宗代 이후 잦은 御札 또는 御筆의 封進은 관직 제수를 노린 封進者의 의도와 함께 왕권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즉,肅宗朝이 후 君臣分義를 강조하면서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던 숙종의 정치적 의도와 결합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어찰이나 어필의 봉진이 많아졌다. 선왕의 어찰 전통을 계승하여, 正祖는 在位 후반부 복잡하고 미묘한 정국 상황 속에서 정치 운영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인 人事문제를 해결하고자 자주 어찰을 활용하였다. 『正祖椰札帖』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 이를 반영하며, 대략 306명 정도가 거론되었다. 正祖는 어찰을 통해 好惡를 명확하게 밝히면서 자신의의 도대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 점은 時派 계열의 少論인 李?秀 ? 李時秀와 時派계열의 老論인 金載瓚의 평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찰을 통해서 정초의 인불 평가 및 인사 관리기준 내지는 好惡의 기준 퉁이 무엇 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대개 時勢에 영합하지 않고 士類의 의리를 지키는 자세였으며, 정조가 “우리 편 사람[我固中人]” (『정조어찰첩』, 637)이 라고 했던 ?派들이 堅持하던 정치적 자세가 아닐까 판단된다. 다만 ?派가지키려는 ‘義理’와 正祖가 주목한 ‘?派의 義理’가 같은 것인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규명 이 필요하겠다. 아울러 본고에서 淸代 雍正帝의 密折 활용에 대해서 언급하였거니와, 향후 의미있는 연구와 결론을 위해서는 이전 시기 국왕 또는 같은 시기 중국의 御札을 포함한 國王文書에 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Ⅰ. 머리말 Ⅱ. 正祖 이전 御札의 활용과 封進 Ⅲ. 『正祖御札捷』에 나타난 인물 평가 Ⅳ. 맺음말 [국문초록] [中文提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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