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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新羅 中代 王權과 密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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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선덕여왕대부터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밀교는 이후 신라 중대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왕권과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다. 文武王代의 明朗이 『灌頂經』 과 『金光明經』에 바탕을 둔 文豆婁法으로 당나라 군사를 격퇴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통일 이후의 밀교승으로는 惠通이 있다. 혜통은 孝昭王代 國師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神文王과 효소왕에게 이상적인 정치를 권고하는 국가 치국책을 제시하였고, 동시에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呪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8세기 중반, 寶川은 오대산 신앙을 체계화하였는데, 이 오대산 신앙은 밀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보천이 오대산에서 수행할 당시, 신라는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지만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기록들은 당시 신라가 불안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聖德王代에는 大祚榮이 渤海를 건국하였으며, 일본이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 역시 신라에게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천은 불안정한 신라를 안정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며, 그 방법으로 현세 이익적이며 護國鎭護의 성격이 강한 밀교 사상을 바탕으로 오대산 신앙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밀교는 신라 중대 왕실을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Ⅰ. 머리말 Ⅱ. 善德女王代 安弘과 慈藏 Ⅲ. 文武王代 明朗의 文豆婁秘法 Ⅳ. 孝昭王代 惠通의 國師 任命 Ⅴ. 聖德王代 寶川의 五臺山 信仰 Ⅵ.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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