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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일제시기 상해 仁成學校의 설립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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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1910년대 초부터 상해에는 소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자녀 교육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당시 상해 한인 자제들은 한인 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외국학교에서 교육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제에 의해 조국이 강제병탄되고 국외에서 유랑생활을 경험한 한인들은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다. 상해로 이주한 한인들은 날로 늘어나는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인성학교는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여 설립되었다. 인성학교는 1916년 9월 1일 상해 공공조계에서 ``상해한인기독교소학``이라는 교명으로 개교하였다. 인성학교는 소학교로 출발하였지만 그 목표는 상해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들의 가장 완비된 모범교육기관으로서 초등·중등·전문과정을 교육하는 종합학교를 지향하였다. 인성학교의 교육목표나 내용은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德智體``의 삼육을 바탕으로 건전한 육체와 인격을 갖춘 인재 양성을 중시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인성학교는 학생들에게 투철한 ``한국혼``을 주입하여 장차 독립운동인재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인성학교의 교과내용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이 위주였다. 교과목도 한글,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에 치중하였다. 수업은 한국어로 하고 일본어는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교과서는 인성학교에서 직접 등사로 밀어 제본한 교본을 사용하였다. 인성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선우혁, 여운형, 김태연, 김두봉 등이 교장으로 역임하였다. 학생수는 1916년 개교 당시 4명이었지만 1920년도 신학기에는 학급수가 4개로 늘어나고 유치원급이 증설되면서 학생수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매년 50~70명 선의 학생수를 유지하였다.

Ⅰ. 머리말 Ⅱ. 인성학교의 설립 배경 Ⅲ. 인성학교의 설립 Ⅳ. 인성학교의 운영 Ⅴ.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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