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133246.jpg
KCI등재 학술저널

조선후기 大芚寺 현창 운동과 그 의미

  • 129

조선후기 불교계의 자생적인 활동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지역은 호남지역이다. 17세기 이후 호남지역에 다수의 고승들이 출현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주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찰이 대흥사다. 대흥사는 임진왜란 이후 청허계의 편양파와 소요파가 정착한 곳으로 많은 훌륭한 禪師와 講師들이 배출되었다. 대흥사 현창 운동은 18세기 말에 본격화된다. 그 시발은 戒洪이 1777년에 西山大師碑를 재건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그 서산대사비의 碑文 가운데 일부가 조작되면서 서산대사와 대흥사의 인연이 강조되었던 것 같다. 그 후 계홍이 1786년에 서산대사의 遺意가 기록된 「寶藏錄」을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 가운데는 ``서산대사가 대둔사는 宗統이 돌아갈 곳이므로 衣鉢을 전수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대흥사 승려들은 1788년에 「보장록」의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면서 대흥사 境內에 서산대사의 忠義를 기리는 표충사 건립을 요청하였고, 그 해에 국가로부터 公認되었다. 그러나 「보장록」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세기 초 『大芚寺志』 편찬자들은 「보장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서산대사 遺意를 강조하고 12宗師와 12講師의 계보를 확립하면서 대흥사가 팔도의 宗院임을 표방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송광사가 僧寶寺刹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대흥사 승려들의 자신감이 표출된 것으로 18세기 이후 불교계의 중심 활동 지역이 전라도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서론 Ⅱ. 寶藏錄과 서산대사 遺意 Ⅲ. 『대둔사지』 편찬과 그 의도 Ⅳ. 결론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