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환국 직후 勳戚의 譏察 문제를 둘러싼 노소간의 갈등은 결국 관중 인식에 내재한 尊王論에 관한 논쟁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측은 주나라를 보위하여 존왕의 의리를 실천한 관중의 공로에 주목하였고, 윤증·박세채를 비롯한 소론측은 관중의 공적이란 결국 패도에 불과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관중 인식의 차이가 바로 경신환국 당시 기찰이라는 비법적 행위를 저질렀던 훈척에 대한 평가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두 정파 사이의 이 같은 견해 차이는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노론측은 관중에 대한 긍정과 존왕론의 강조를 통해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 한 반면, 소론측은 관중에 대한 비판 및 왕도정치의 실질성을 강조하며 호란 이후 송시열에 의해 체계화된 반청 이데올로기의 관념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이론적 토대인 春秋大義의 時宜性 상실을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관중 인식의 차이는 존왕론에 대한 찬반이었고, 이는 17세기 후반 조선이 당면한 세계질서 속에서 춘추대의에 대한 찬반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의견 차이가 드러난 사건이 바로 훈척에 대한 논란이었고 이는 결국 노소분기의 근원이 되었다. 요컨대 노소분기라는 사건의 심연에는 춘추의리의 채택 여부를 둘러싼 인식의 차이가 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Ⅰ. 머리말 Ⅱ. 仁者인가, 覇者인가?: 管仲 인식에 담긴 현실적 의미 Ⅲ. 管仲에 대한 상반된 평가와 老少分岐 Ⅴ. 맺음말 [국문초록] [中文提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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