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최근 검색어 전체 삭제
다국어입력
즐겨찾기0
133246.jpg
KCI등재 학술저널

고구려 남도ㆍ북도와 고구려 산성의 축성

  • 189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점은 고구려와 모용씨가 요동지역을 둘러싸고 대립하던 3세기 말부터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점하기 전 시기인 4세기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특히 342년 전연과의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어 고구려 남도와 북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고, 당시의 문헌 기록을 재검토하면서 고구려 남도와 북도의 경로를 파악해 보고자 하였다. 그동안 고구려 남도와 북도의 경로에 대해서는 각각 4가지 설이 제시되어왔다. 그 가운데 南道는 渾河→蘇子河→富爾江→新開河→集安으로 이어지는 노선, 北道는 撫順(渾河)→淸原→揮發河(柳河)→通化→ 葦沙河→集安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당시 新城의 소재와 요동지역의 상황, 그리고 고구려 산성의 분포 상황을 통해 볼 때 기존까지 남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渾河→蘇子河→富爾江→新開河→集安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북도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전연은 당시 요동지역 상당 부분의 교통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혼하 이남의 특정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병사를 집결할 수 있는 역사적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전연이 고구려의 허를 찌르면서 공격한 남도는 혼하 이남에 위치하는 태자하 유역을 따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고구려 산성은 이러한 역사 과정 중에 파생된 물질적 자료로서, 본고에서는 3세기 말~4세기까지 고구려 남도·북도상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고구려 산성의 실제적인 모습을 좀 더 구체화해 보고자 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 산성은 기본적으로 石築 산성이 축조되었다. 특히 쐐기꼴(楔形) 성돌의 사용은 고구려 산성의 축성 가운데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구려 산성의 유형으로는 包谷式, 山頂式, 기타 유형인 馬鞍式, 山腹式의 유형도 확인된다. 이 가운데 산정식이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유형은 군사적인 성격의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하다. 그러나 太子城, 五龍山城 등의 포곡식 산성, 또는 마안식 산성은 단순한 군사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지방통치를 위한 거점성으로서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산성의 규모는 도성을 비롯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중소형급인 1000~1500m 규모이다. 성벽을 제외한 고구려 산성의 시설로는 성문과 치, 성가퀴, 돌구덩이(石洞) 등이 있는데 이들 시설 모두

Ⅰ. 머리말 Ⅱ. 고구려 남도·북도의 경로에 대한 검토 Ⅲ. 고구려 남도·북도에 위치한 고구려 산성의 특징 Ⅳ.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로딩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