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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新唐書⌋? 권7, 德宗本紀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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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후기와 오대는 ‘藩鎭時代’라고도 하는데, 이는 당시 번진들이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큰 세력을 떨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진이 존속한 시기는 200년간의 ‘당송변혁기’와 꼭 일치하는데, 이는 번진이 장기간의 大변혁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안에서도 德宗연간(779∼805)은 번진들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앞선 代宗(재위; 762∼779)이 번진과의 충돌을 피하며 안주 정책을 펼쳤던 것과 달리 덕종은 즉위 초기부터 강경한 자세를 보였고 그러면서 긴장이 고조되다가 마침내 양자가 정면충돌하였다. 그 결과 유명한 ‘四王二帝’의 반란이 일어나는데, 덕종이 궁지에 몰려 마침내 四王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에 4왕은 일단 반란의 태도를 거두고 당조와의 공존을 바란 듯 보이지만, 2제는 황제를 칭한 만큼 반란을 지속하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신당서? 덕종본기는 당시의 상황을 짧으면서도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료이다. 관련 사서에서는 각 반란의 시점을 명확하기 기술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신당서? 본기는 그 시점들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다. 물론?신당서? 본기는 宋代의 명분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서는 다른 견해가 제시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신당서? 본기는 ?자치통감?이나 ?구당서? 본기보다 간략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에 보이지 않는 기사도 적지 않다. ?신당서?를 관통하는 번진 인식은 方鎭表의 서언에 잘 드러난다. 즉 “당은 中世이후 功을 세우고 난을 수습할 때 비록 항상 번진에 의지하였지만, 나라가 망한 것도 이들에 의해서였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방진표를 만든다”(권64, 1759쪽)라고 한다. 번진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적하면서도 결국은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송대에 주류를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그 후 중국인의 번진론에 큰 영향을 미쳐 번진을 ‘할거세력’으로 보는 전통적 인식의 기반이 되었다(정병준, ≪日知錄≫ ‘藩鎭’ 기사를 통해 본 唐末五代의 藩鎭像,?중국학보? 44, 2001 등 참조). 이 역주의 주된 관심사는 덕종이 번진 개혁에 나선 즉위 초기부터 2제의 난이 종결되는 정원 2년(786)까지에 있다. 이 기간에 덕종은 번진 정책 외에도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양세법의 제정이다. 양세법도 번진개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연구

[개요] [譯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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