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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중농주의와 왕정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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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농학파의 창시자 프랑수아 케네(Fran?ois Quesnay)는 1758년에 발표한 경제표(Tableau ?conomique)?에서 국가, 영주, 교회를 포괄하는 지주계급, “생산계급”인 농민, “비생산계급”인 수공업자의 세 축 사이에 이루어진 다섯개의 교환 흐름으로부터 거시경제 흐름에 대한 추상적 도식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부(國富)는 국가의 재산만이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재산으로 구성되며, 귀금속만이 아니라 필요를 충족하는 모든 재화를 포함한다. 농업만이 유일하게 생산적인 경제활동인데, 파종된 종자가 여러 개의 알곡을 생산함으로써 “순생산” 즉 잉여를 산출한다. 공업과 상업은 농업에 의해서 생산된 원재료를 변형시킬 뿐이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활동이다. 경제정책의 목표는 바로 이 순생산을 증대하는 것인데, 그 최선의 방법은 각자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놓아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농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의 원칙으로서 거래의 자유를 전면에 내세웠다. 케네의 목표는 경제적 자원을 증대함으로써 프랑스의 군사?외교적 지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농주의의 경제사상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프랑스 군주정의 경제정책으로 채택?시도되었다. 1763년 5월 칙령은 왕국 내에서 곡물의 자유로운 유통과 거래를 허용했고, 이듬해 7월에는 제한적으로 곡물의 수출도 허용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곡가 상승을 야기했고, ‘기근협정’을 비난하는 민중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불만을 제기하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곡물거래 자유화 조치를 철회했다. 1774년 루이 16세의 재상으로 임명된 튀르고가 다시 곡물거래 자유화를 추진했지만, 이번에도 ‘밀가루 전쟁’이라 불린 민중의 봉기로 말미암아 튀르고는 해임되고 개혁조치는 철회되었다. 1787년 칼론은 ‘재정개선계획’의 일환으로 곡물거래 자유화 조치를 다시 추진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전(前)혁명의 위기 속에 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중농주의의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다려야 했다.

Ⅰ. 서론 Ⅱ. 중농주의의 이념과 정책 1. 프랑수아 케네의 경제사상 2. 중농주의의 경제정책 Ⅲ. 곡물거래 자유화와 민중의 대응 1. 베르탱-라베르디의 개혁(1763~1764) 2. 튀르고와 ‘밀가루 전쟁’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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