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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明末 山東?稅太監 陳增의 鑛稅 활동과 그 餘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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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 말기 재정위기에 봉착한 만력제는 환관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鑛山의 開採, 商稅의 增徵을 통해 재정 수입의 증대를 도모하였다. 이렇게 파견된 환관들을 鑛稅使라고 불렀다. 만인들의 지탄을 받는 광세사로 요동의 고회(高淮), 회상(淮上)의 진증(陳增), 광동의 이봉(李鳳), 섬서의 양영(梁永), 운남의 양영(楊榮) 가운데 진증은 손꼽히는 자였다. 山東에 파견된 태감 진증은 만력 24년(1596) 윤 8월부터 산동의 동창부(東昌府)와 내주부(萊州府)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광세활동을 행하였다. 후에 그는 점차 활동범위를 회안(淮安)?서주(徐州) 등지로 넓혀갔다. 山東이라는 지역사회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진증은 鑛稅를 원활하게 거두기 위해 그 지역의 서리나 무뢰배를 조력자로 이용하였다. 전면에 나서서 진증을 도왔던 대표적인 무뢰는 휘주(徽州) 흡현(?縣) 출신의 정수훈(程守訓)이라는 자였다. 정수훈은 진증의 질서(姪?)라는 점을 이용하여 진증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였다. 그러나 정수훈 자신도 출신이 산동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현지 출신의 무뢰배나 현지의 미천한 관리를 수하로 받아들였다. 진증은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산동지역에서 전권을 휘두르며 마음껏 착취를 자행하였다. 광세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호부의 재정 권한이 약화된 상태에서 店租등 다양한 명목의 세금마저 환관이 관리하며 호부는 정상적인 정액 세입도 보증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각 省의 세금 체납은 호부가 관할하는 태창고의 수입 부족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태창고의 수입이 부족해지자 국가의 재정은 더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Ⅰ. 머리말 Ⅱ. 태감 陳增의 山東派遣 1. 광세 활동 2. 무뢰 程守訓과의 결탁 3. 광세 활동의 파문 Ⅲ. 地方官 및 稅監과의 불화 1. 知縣 吳宗堯의 진증 탄핵 2. 臨淸稅監 馬堂과의 불화 Ⅳ. 鳳陽巡撫 李三才의 이간책 Ⅴ. 진증의 활동과 그 餘震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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