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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고려 태조의 改元政策과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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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가 후당의 연호를 수용한 태조의 개원정책이 갖는 의미에 대해 분석한 글이다. 태조가 ‘천수’를 독자적인 연호로 채택했던 것은 신라왕실에 반기를 든 반란세력의 의도와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어 있던 신라와 그 왕실을 정통왕조로 비호하는 중국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었다. 태조는 신라와 중국 사이에 유지되고 있던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로부터 이탈을 시도했지만, 그것이 중국중심의 세계질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중국으로부터 정통왕조로 인정받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에게 신라는 궁극적으로 극복될 ‘나라’였지만, 중국은 자신의 왕조를 비호해줄 ‘나라’였다. 그가 독자적인 연호로 채택한 ‘천수’도 周의 武則天이 이미 사용했던 연호인데, 그것은 태조가 唐도 망해버리고 後粱의 정통성도 부정되는 상황에서 과거의 무측천으로부터 고려의 추구할 정책방향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조는 후당을 구심점으로 한 중국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고자 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신라왕실을 대신해서 정통왕조로 인정 받으려고 하였다. 태조가 이처럼 교섭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후당이 당 왕조의 계승을 선언하면서 정통성을 회복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태조는 천수 16년에 비로소 후당의 책봉을 받고 연호를 수용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거란과 교섭한 결과였다. 거란과 적대관계에 있던 후당은 태조의 양면 외교에 대한 불신으로 견훤을 책봉하였다. 그러나 견훤 역시 후당과 거란을 상대로 양면 외교를 전개하자, 후당은 결국 天成3년(928) 12월에 고려를 신라?발해와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후당은 이를 통해 고려로부터 거란에 대한 견제를 기대했다. 태조가 후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 연호를 수용한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태조가 후당의 연호를 수용한 것은 후당의 강요보다는 오히려 태조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Ⅰ. 머리말 Ⅱ. 冊封朝貢體制와 연호 Ⅲ. ‘天授’ 연호의 사용과 그 의미 Ⅳ. 後唐 연호의 수용과 그 의미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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