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1547~1634)은 선조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간 후 관료로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는 평안도 도순찰사로 임명된 후 평안도 지역의 민심수습과 병사모집 및 군수조달에 전력을 기울였고, 선조의 피난에도 적극적으로 보필하였으며, 평양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 하였다. 또한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군 기강 확립, 산성의 개보수, 군사훈련 등의 현안에 매진하였다. 광해군 즉위와 함께 영의정에 임명된 이원익은 국정전반에 관하여 과감한 개혁책을 주장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인목대비의 폐모론과 관련하여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켜, 결국 그와 그를 동조하던 인사들은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가 집권을 한 후 다시 영의정에 발탁되었으며, 이후에도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도체찰사 자격으로 이괄의 난을 수습 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인조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가시화 되었을 때는 이미 80대 중반의 고령이었지만, 국가 원로로서 임진왜란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하였다. 이원익은 선조에서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국가의 요직을 맡으면서,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국방의 다양한 현안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수습하 역할을 하였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에 기울지 않고 국가의 현안 해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의 합리적인 처신은 3대에 걸쳐 6번이나 영의정을 맡는 ‘진기록’을 세우게 했다.
Ⅰ. 머리말 Ⅱ. 선조대의 정국과 이원익 1. 임진왜란 이전의 활동 2. 임진왜란과 이후의 활동 Ⅲ. 광해군대의 정국과 이원익 Ⅳ. 인조대의 정국과 이원익 Ⅴ.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