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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18세기의 연행과 정조(正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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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조선시대에 한-중 관계에서 빼놓은 수 없는 현상 가운데 하나인 연행(燕行)에 따른 이해와 오해를 다룬 논문이다. 종래 연행에 대한 연구를 검토해보면 연행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오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가운데는 이전의 연행록에 기록된 정보를 단순하게 따르면서 오해한 부분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전 사람들의 세계관을 반복함으로써 달라진 청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도 있었다. 연행록을 연구하였던 연구자들도 연행록이 가지는 자료의 한계를 분명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변화된 부분만을 확대해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나아가 연행의 당사자였던 청조의 정책 변화, 현실에서 유화된 부분 등에 대한 파악을 충분하게 하지 못한 채 조선의 입장에서 연행을 통해 파악하여 깨달은 ‘진실’에 지나치게 흥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본다면 연행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좀 더 확대되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연행의 당사자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의 국왕이 연행을 어떻게 대하였는가의 문제는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소홀하였던 부분이었다. 연행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하였던 18세기, 특히 후반의 경우 정조는 연행에 매우 민감하게 관심을 표하고 이를 통해 얻은 정보를 국정에 직접 활용하기도 하였다. 연행에서 획득한 정보가 ‘개인의 깨달음’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정보의 획득과정을 거쳐 국정에서 활용되는 정보로서 기능한 것이었다. 정조는 그의 정치운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던 화성(華城)의 건설에서, 또 창덕궁의 품계석(品階石)의 설치에서, 또 군사(君師)의 모범을삼으려는 관심에서 청으로의 연행에 당대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金弘道)와 이명기(李命祺)를 파견하였다. 18세기의 연행은 조선의 갱신 기회를 만들려던 정조에게도 매우 소중한 창구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Ⅰ.머리말 Ⅱ. 18세기의 연행에서 옛사람의 오해 Ⅲ. 18세기의 연행에 대한 지금 사람의 오해 Ⅳ. 정조와 연행 정보의 활용 1. 외교와 정보의 획득 2. 국가 운영을 위한 정보의 활용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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