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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나혜석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지원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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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부터 경기도 수원에서는 불꽃같은 정열의 여성을 해마다 기리고 있다. 바로 나혜석이 그 주인공이다. 정월 나혜석(1896~1948)은 경기도 수원에서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지방 관료를 지낸 나기정의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집안의든든한 후광을 바탕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유학생활은 치열했다. 남학생들의 편견과 식민지 여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봉건적 인습과 민족적 차별이라는 두터운 벽에 가로막혀 있던 나혜석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인습과 차별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여자계]의 발행과 삼일운동 참여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기존 나혜석 연구는 나혜석의 문학적 측면, 여성학적 측면, 최초의 여성화가라는 수식어 명명에 집중적으로 할애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나혜석 연구는 한층 성숙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시각은 다양성을 내포하면서 사회 전 분야를 고루 아우르고 있었다. 나혜석이 한국 근대사에서 선각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의 모든 연구에 ‘선각자 또는 선구자 나혜석’을 부각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혜석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쳤던 시기이자 인생의 이막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생활이 시작되던 안동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안동에서의 생활은 나혜석의 민족의식이 민족운동과 결합한 3?1운동의 참여를 넘어선 ‘기득권’ 생활의 포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만큼 안동은 나혜석의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가 그린 만주 특히 안동은 국경도시이자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었다. 시간의 흔적을 더듬던 나혜석은 이혼 후 잡지 삼천리에 안동의 모습을 그렸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역사에서 첫 신도시 신의주를 건설하여 대륙으로 가는 창구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는 한반도로 오는 창구로 안동을 적극 활용했다. 안동에 일본영사관이 타 지역에 비해 빨리 설립된 것도 이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나혜석이 지닌 독립 운동가로의 위상을 밝혀 그동안 한국 근대사의 ‘선각자, 선구자’ 및 ‘실패한 여성운동가’로 짓눌린 나혜석의 인생의 황금기를 복원하려 했다. 바로

Ⅰ. 머리말 Ⅱ. 민족의식 자각, 삼일운동에 참여하다 Ⅲ. 중국 안동에서의 생활 Ⅳ. 보이지 않는 손,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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