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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신라 헌덕왕대의 副君 秀宗의 정체성과 太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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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2대 헌덕왕이 재위 후반 동모제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거하게 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수종의 부군 임명을 태자 책봉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그의 부군 임명 직후 맞이한 태자비 정교가 수종(흥덕왕)의 비와 동일인이 아니며 이외에도 수종이 태자를 관칭하며 주인공처럼 등장한 「녹진전」의 작위적 구성이나, 「민애왕 석탑기」에 헌덕왕의 왕자로 파악되는 心智의 존재 등은 부군 수종과 구별되는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인 태자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삼국사기』의 태자 책봉시 표기 방식은 ‘立인명爲(王)太子’, ‘封인명爲(王)太子’로 인명 앞에 ‘立’과 ‘封’을 적기하는데, 수종은 일반 관직자의 임명시 표기 방식인 ‘以母弟秀宗爲副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태자 책봉은 혈연관계를 포함한 ‘태손’이나 ‘태제’ 등의 중국식 표기가 아닌 일괄 ‘태자’로 일관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만일 헌덕왕이 처음부터 수종을 계위권자로 인정했다면 당연히 태자로 책봉했을 것이나 부군으로 임명했음은 태자와 차별적인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부군 수종은 정치력을 꾸준히 확장시켰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동생이자 현 상대등인 충공을 포섭하여 계위에 성공했다. 당시 상대등 충공은 태자의 장인이자 숙부로서 태자의 후원자가 될 수 있었지만, 수종이 무자인 까닭에 그 뒤를 이어 계위의 여지가 있었던 까닭에 최종적으로 수종의 편에 섰던 결과였다. 결국 계위에 실패한 헌덕왕의 태자는 책봉 행적은 물론 관련 기록이 모두 탈락하며 이름조차 전하지 않게 되었다.

Ⅰ. 머리말 Ⅱ. 태자와 공존한 부군 수종 Ⅲ. 수종의 거처 월지궁과 동궁 Ⅳ. 부군 수종과 태자의 정치력 Ⅴ. 맺음말 [국문초록] [日文抄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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