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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中古期 新羅 築城碑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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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신라가 왕경을 방어하는 산성을 쌓았을 때 세운 비석인 남산신성비(591년)와 명활산성비(551년)에 관한 연구다. 원비 조사를 통해 판독문을 수정하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비문 내용을 재검토했다. 남산신성비에 대해서는 歷名部分을 4집단으로 나눠서 검토했다.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인 A집단에 대해서는 邏頭가 새로 신라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 파견된 지방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지방관의 인원수가 비문에 따라 다른 것은 지방지배 방식이 지역마다 달랐던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특히 제9비에 지방관이 안 보이는 것은 仇伐지역이 일찍 신라 영역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군 레벨의 지방민 책임자인 B집단에 대해서 제1비의 「郡上村主」는 지금까지 「郡中上人」과 같은 것이며 군 레벨 재지유력자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郡中上人인 村主」의 뜻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신라 중고기 금석문에 보이는 촌주의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의 촌주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또 匠尺이나 文尺도 군중상인이라는 役名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했다. 성ㆍ촌 레벨 책임자인 C집단에 대해서는 役名으로 「城徒上人」과 「村/里作上人」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을 밝혔다. 또 성 안에는 몇 개 촌이 존재하는 사례가 보이지만, 촌의 경우에는 그런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종래 지방제도에 있어 성과 촌은 동등하다고 생각되어 왔는데 성과 촌의 위상은 달리하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기술자인 D집단에는 「面石, 胸石, 不石, 小石」의 네 가지 유형의 기술자에 대한 명칭이 있었고 비문마다 기술자의 구성도 달랐다. 이는 축성담당 장소의 난이도에 의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종래 비문에 적혀있는 사람들 이외에 많은 雜役夫가 있었다고 추정해 왔는데 축성에 관한 사료를 살펴본 결과,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전국의 성 촌에서 축성을 위해 7명씩 균등하게 동원한 것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활산성 단계에서는 군에 파견된 지방관은 1명뿐이며 군 안의 力役動員은 재지유력자한테 맡겨졌다고 추정했다. 명활산성비와 남산신성비 사이의 40년이란 기간 동안에 신라 왕권의 지배력이 성ㆍ촌까지 침투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Ⅰ. 머리말 Ⅱ. 判讀文 및 歷名表 Ⅲ. 남산신성비 Ⅳ. 명활산성비와의 비교 Ⅴ. 맺음말 [국문초록] [일문초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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