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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高麗靑瓷 出現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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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려청자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 요인을 자기의 제작과 관련된 기술과 생산(자본) 그리고 수요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청자가 越窯의 청자제작기술을 토대로 하여 출현하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시기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940년대였으며, 이 시기에 다수의 越窯陶工들이 고려에 이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월요의 청자제작기술이 고려에 “전파”된 것과 관련하여 가장 큰 의문은 이 시기에 하필 월요의 도공들이 고려로 이주하였을까 하는 점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본래 한반도에서 중국의 浙東地方으로 이주하여 월요에서 窯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예들이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즉 그들이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고려에 돌아왔으며, 그들을 통하여 월요의 청자제작기술이 고려에 전해졌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고려에서 월요의 청자제작기술을 “수용”하여 窯場을 설립하고 청자를 생산한 주체로는 고려정부와 호족들이 거론되어왔다. 하지만 고려정부가 청자의 생산을 주도하였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을 분석해볼 때, 그다지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힘들다. 신라말고려초의 유력자였던 豪族들이 한반도 출신 월요도공들을 받아들여 요장을 설립하고 청자를 생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고려의 “초기청자”요장들이 중서부지방에 산재해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지방의 호족들이 그 주역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즉 중서부지방의 호족들이 곧 생산(자본)의 측면에서 고려청자의 출현을 이끈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한편, 신라 말기에 禪宗이 유행하면서 승려층이 새로운 飮茶階層으로 등장하고 아울러 고려 건국 직후 태조의 불교정책에 힘입어 승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이들은 고려청자의 최대의 잠재적 수요층으로서, 누구보다도 이들이 수요(소비)의 측면에서 고려청자의 출현을 견인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초기청자의 생산품이 완 등 음다와 관련된 것들에 집중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Ⅰ. 문제의 제기-연구사와 방법론적 성찰 Ⅱ. 월요청자제작기술의 전파와 그 실상 Ⅲ. 월요청자제작기술의 수용과 청자 생산의 주체 Ⅳ. 고려초기 청자 수요의 증가 Ⅴ. 나머지말-고려청자의 출현, 必然인가 偶然인가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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