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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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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년 7월에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마읍산을 점 령한 후 8월에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어 9월에 결빙된 압록강을 돌파한 계필하력의 유목기병군단은 평양으로 향했다. 그러나 하력에게 철수명령 이 떨어졌다. 고구려가 거란 제부족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고, 회 흘이 본거지에서 철륵의 반란을 주동했다. 그해 말 당군은 철륵을 추격하다가 휘하의 1만 3200명의 병력을 상실 했고, 662년 2월 고립된 소정방도 평양성에서 수만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철군했다. 662년 백제 웅진성에 주둔한 유인궤 등에게 철수를 권유하는 당고종의 칙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당고종의 의지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659년 장손무기가 제거 되고 측천무후가 등장했다. 그녀는 조정 내에서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시키 기 위해 태산 봉선의례를 촉구했다. 662년 초 당이 고구려와 철륵에게 패 배했고, 연이은 패전 상황은 측천무후가 태산 봉선을 밀어붙이는 기회를 주었다. 662년 10월 봉선의례 발표가 있었다.

Ⅰ. 머리말 Ⅱ. 당의 평양성 포위와 고구려의 초원 공작 Ⅲ. 평양성 撤軍과 鐵勒문제 봉합 Ⅳ. 泰山 封禪 詔書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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