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은 험난하고도 지루한 과정으로 點綴되었다. 삼 국 가운데 弱體國이었던 신라는 백제의 부단한 攻勢로 인해 지금의 서부 경상남도 지역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自力으 로 막을 수 없는 국가 위기 타개책으로 신라는 고구려를 고려했지만 성과 가 없었다. 신라는 647년에 김춘추를 倭에 파견했다. 그 역시 성과가 없었 다. 마지막으로 신라는 앞서와 동일하게 비중이 큰 重臣 김춘추를 唐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김춘추와 당태종간의 約定이 이루어졌다. 그들이 설 정한 원대한 마스터 플랜에 의하면 신라와 당이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의 지분에 관한 논의가 확정되었다. 평양 이남의 영역과 백제 영역을 신라에 귀속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 사실은 평양 이북과 요동 지역 에 대한 지배권은 唐이 갖는다는 ?契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2차세계대전 終戰 직전의 얄타회담이나 포츠담 선언에서 잘 드러났듯 이 점령할 국가의 舊土 分轄 문제는 이해가 상충되는 아주 미묘한 사안이 었다. 이때 당은 고구려 舊土에 대한 연고권을 제시했을 게 자명하다. 당 태종 이전인 통일제국 隋代 이래 중국인들은 遼東 지역이 당초 중국 영역 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중국이 곧 탈환해야할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소위 四郡 지역이 그러한 범주에 속하게 된다. 唐은 고구려 영역 가운데 과거 한사군의 영역과 魏代 이후의 요동군을 수복지로 지목하였다. 즉 낙랑군 과 더불어 현도군과 진번군과 임둔군인데, 이 중 短命한 진번군과 임둔군은 상징성은 물론이고 존재감마저 없었다. 현도군은 제3현도군이 지금의 요녕성 무순에 소재한 관계로 요동 지배로 인해 自動 마무리된 것으로 인 식했을 것이다. 반면 진번군의 後身인 대방군은 백제 건국지로 인식되었 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삼한 통합론을 제기한 신라의 지배를 인정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요컨대 唐의 漢四郡 故地收復論은 작금의 東北工程 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 크다. 唐이 제기한 中國故土收復論은 역사에서 찾 는 침공 명분론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현재도 중국이 여전히 유효하게 사 용할 수 있는 기재이기도 하다. 통일제국이 형성되자마자 제기된 隋代 이 래 당태종 등이 제기한 논리가 고구려 征伐論이었다. 그러한 근거는 21世 紀 統一韓國의 중대한 장애 요인으로서 수면하에 잠재하고 있음을 감지해 야 한다. 결국 역사는 부
Ⅰ. 머리말 Ⅱ. ‘民族’ 槪念 以前의 同質 意識인 ‘海東’과 ‘三韓’ 意識 Ⅲ. 백제 打滅 構想期(642~647) 1. 백제의 공세 압박 2. 신라의 選擇과 內戰 Ⅳ. 唐과 연계한 통일 구상 : 準備期(648~659) 1. 唐服과 唐年號의 受容 2. 平壤 以南 新羅 領有權 胎動 根據 Ⅴ.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