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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漢의 沃沮 지배와 토착 지배층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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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평양시 낙랑구역에서 발견된 정백동 1호분에서는 銀으로 주조 된 인장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그 印文에는 ?夫租?君?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夫租’는 곧 沃沮를 뜻하며, 이를 통해 이것이 기원 전 1세기 무렵 활동하였던 옥저 지역의 토착 거수 夫租?君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 본고는 이 夫租?君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 삼아 기원전 1세기 무렵 漢의 지배 속에서 옥저의 토착 지배층이 어떻게 대응하여 나갔는지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부조예군이 활동하였던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로 당시 옥저 지역 은 玄?郡의 관할 하에 놓여있었다. 부조예군은 이러한 현도군의 통치에 협조하면서 토착 지배층으로서 지역 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기원전 75년 무렵 현도군의 퇴축과 동부도위의 설치라는 옥저 지역의 격변기를 맞아 낙랑군으로 거주지를 옮 겨오게 된다. 그러나 부조예군의 무덤인 정백동 1호분에서 출토된 다량의 부장품들을 통해 볼 때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낙랑군에서 매우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덤에서 많은 양의 무기류 가 출토되었던 점을 통해 볼 때 생전의 정치적 위세는 대단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부조예군은 무슨 연유로 낙랑 지역에 옮겨오게 된 것이며, 또 그가 새로 옮겨온 낙랑 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높은 사회적 위치를 향 유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기원전 75년 무렵 夷貊의 침입 속에 현도군이 붕괴하자 漢은 당시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樂浪郡에 옥저 지역을 편제시키고 한층 긴밀한 군현 지배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서 토착 지배층 중심의 자치력이 작동하던 옥저의 재지 사회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부조예군을 비롯한 유력 토착 지배세력은 오히 려 이와 같은 郡縣 정책에 적극 편승하였다. 무덤에서 발견된 ?夫租?君? 銀印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는 유물로서 낙랑군이 옥저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 협조한 옥저의 토착 지배층에게 내렸던 賞賜品이었던 것으로 분석 된다. 즉 옥저의 유력 토착 지배층들은 낙랑군 중심의 지배 체제 개편에 협조하면서 낙랑 사회 내에서도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 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낙랑군의 沃沮 지역 통치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Ⅰ. 머리말 Ⅱ. 漢의 沃沮 지배 추이 Ⅲ. 玄?郡 시기 沃沮 토착 지배층의 동향 Ⅳ. 夫租?君 樂浪 移居의 배경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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