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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고려 말 정치·권력구조의 한 측면 -위화도 회군 이후 창왕대 정국에서의 황제권 작용 양상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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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388년 위화도 회군과 그에 이어지는 우왕 ‘선위’ 및 창왕 옹립, 그리고 창왕 폐위에 이르는 일련의 정쟁 과정에서 황제권이 작용하 는 양상을 통해 고려 말 정치·권력구조의 한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선 건국 과정은 이성계를 중 심으로 한 무장세력의 군사력이 일차적인 기반이 되었지만 그 과정은 정치 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조선 건국의 또다른 주체인 신흥유신들 이 개혁의 방향성을 두고 분기해 가는 과정이었다. 회군세력이 우왕을 ‘폐 위’시키지 않고 事大의 예를 거스른 요동 정벌 결정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선위’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逆行에 면죄부를 받았던 것은 이 과정에서 황제권이 회군세력의 권력을 밑받침하는 명분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회군세력의 권력이 황제권을 명분으로 삼게 된 상황은 고려 내의 권력 과 황제권이 사실상 단절되어 있던 고려전기의 상황과 차별성을 갖는 한편 으로, 황제와의 직접적 관계에 따라 실질적인 권력이 부여되었던 몽골 복 속기의 상황과는 단절과 연결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이에 창왕 즉위 후에는 그러한 ‘명분’을 내외적으로 확인받기 위한 과정에서 국왕의 친조 나 황제가 파견한 관리에 의한 국정 감독을 요청하거나, 고려 신료들이 황 제에게 직접 반대세력을 고발하고 이에 대해 칙사의 파견과 조사를 요청하 는 등 정치와 외교의 경계가 흐려져 있던 몽골과의 관계에서 일상화한 정치·외교 방식이 활용되기도 했다. 한편, 명과 직결되어 있던 회군의 명분이 명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가운데, 회군세력은 또다른 명분이자 권위로서 고려왕실의 권위를 가져왔 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증명하기 어려운 주장의 ‘진실성’ 을 담보해줄 수 있는 권위로서 회군세력은 명 황제의 권위를 빌어 왔으며, 이는 이후 ‘폐가입진’이라는 논리로 전용되면서 회군의 정당성에, 우· 창 폐위 및 처형, 나아가 회군 세력과 대립했던 정치세력들을 숙청하는 과 정에서 중요한 명분으로서 해석되고 활용되었다.

Ⅰ. 머리말

Ⅱ. 우왕 선위와 창왕 옹립의 내외적 배경

Ⅲ. 창왕대 국왕 친조·감국 요청과 명분의 전환:

명분적 권위로서의 황제권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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