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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교회에서 국가로 중세 서구 정치질서의 전환: 1333년 프랑스 뱅센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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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서양중세 정치사상에서 가장 전형적인 구도였던 위계적 성· 속 이원론과 이에 기반을 두고 있던 성직자지배론 또는 신정정치론이 역사 적 현실 속에서 언제, 어떻게 약화되어 갔는가를 14세기 전반기 프랑스의 경우를 사례로 살펴보고 있다. 이미 1303년 아나니 폭거로 아비뇽 교황시 대가 시작되면서 교황권이 실추되긴 했지만 1315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왕 국의 정치적 위기는 아비뇽 교황 요하네스 22세에게 사목적 이상에 따른 교황권의 위상을 회복시켜 주었고 이를 기반으로 그는 치밀한 행정·재정 체제를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337년 백년전쟁이 일어날 때부터 교황은 서유럽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영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이에 본 논문은 서유럽 세계 내 교황권의 결정적인 실추의 계기를 1333년 뱅센 토론회로 보고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카페왕조 방계로서 왕위에 오른 필리프 6세는 왕권 정당화 작업의 일 환으로 십자군 원정을 대대적으로 준비했고 교황 요하네스 22세는 영적 지도자로서 필리프 6세를 시혜적인 차원에서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이러 한 와중에 교황 요하네스 22세는 자신만의 독특한 지복직관론을 주장했고 필리프 6세는 파리대학 신학자들을 동원하여 이를 검증하기 위한 대토론 회를 1333년 뱅센궁에서 개최했다. 이 토론회는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주 제로 개최되었지만 교황권에 대한 프랑스 왕권의 독립성 천명하려는 의도 또한 지니고 있었다. 결국 이 토론회는 교황의 입장을 이단으로 몰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요하네스 22세는 곧 사망하고 말았다. 뱅센 대토론회 이후 프랑스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현상이 등장했 다. 첫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중심으로 파리대학에서 형성되기 시 작한 신학적 교조주의이고 둘째는 파리대학과 프랑스왕권의 긴밀한 관계 구축이다. 마지막으로 요하네스 22세의 죽음은 십자군 원정에 부정적이었 던 베네딕투스 12세의 즉위로 이어졌고 십자군 원정계획의 좌절은 뜻하지 않게도 백년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물론 뱅센 대토론회는 이러한 서로 다른 세 현상들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양한 영역들에서 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보편적 질서가 쇠퇴하고 새로 운 질서들로 대체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Ⅰ. 들어가며

Ⅱ. 필리프 6세 치세 초기의 성격

Ⅲ. 필리프 6세와 요하네스 22세의 협력과 결별

Ⅳ. 1333년 뱅센 토론회

Ⅴ. 나가며: 뱅센 토론회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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