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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추수 金台榮의 현실인식과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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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민족분열을 획책한 문화통치로 변화는 합법적인 활동영역 확대 로 이어졌다. 일제의 의도는 민족구성원 상호간 대립·갈등을 조장하는 가운데 불 신감을 도모함이었다. 식민통치에 우호적인 사회지도자 육성은 궁극적인 지향점 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사·천도교계·개신교계 등은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문화계몽운동을 주요 현안으로 부각시켰다. 개조론 풍미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과 맞물려 있었다. 근대교육 시행에 의한 사회개조는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당시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청년단체는 이를 반증한다. 김태영이 1920년 9월 동양선교 회 안성복음회 주최인 교회간친회 모임을 주선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태영은 1920년 4월 동아일보사 안성분국 기자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2월 안 성분국장과 1923년 8월에는 안성지국 승격과 동시에 지국장이 되었다. 이후 1940 년 8월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그는 언론인으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에 충실했다. 안성지역 사회운동 전반에 관한 사실이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된 배경은 김태영의 열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언론을 통한 외부 세계와 소통·교류 확대는 이곳 다양한 사회운동을 진전시키는 기폭제나 다름없었다. 1920년 4월 1일 조직되었으며 안성군의 민족운동을 주도하고, 청년야학회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에 노력하는 한편 안성공원에서 운동회 등을 개최하여 주민들 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김태영이 집행위원장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는 1928 년 10월 이 단체를 탈퇴할 때까지 청년운동·여성운동·형평운동·교육운동·언 론운동 등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다. 신간회 안성지회 정치문화 총간사로서 활동도 지역사회와 본부와 원만한 교류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교육운동에도 매우 열성적·적극적인 자세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안성지방 상 임위원 취임은 이를 반증한다. 유치원 설립에도 의연금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5년 안성청년회 임원들과 강습소인 安靑學院을 설립한 이래 1930년 5월에는 초등교육기관인 안청학원으로 변경하는 동시에 이사 장에 취임하였다. 이외에도 구호활동 등을 통하여 안성지역의 생활향상을 도모했다. 이처럼 김태영은 안성지역의 근대부터 현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변혁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민족적 자존

Ⅰ. 머리말

Ⅱ. 김태영의 생애와 현실인식

Ⅲ. 안성지역 민족운동과 김태영의 활동상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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