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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新羅의 初期 外位體系와 ‘及伐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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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직관지 外位條에는 干 아래에 一伐, 一尺, 波旦, 阿尺의 등급만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진흥왕대에 작성된 함안 성산산성 출 토 신라목간에서 ‘及伐尺(急伐尺)’이라는 새로운 외위 등급이 보고되었다. 또 ?봉 평리비?(524년)에서도 종래 ‘居□尺’으로 판독한 글자는 ‘居伐尺’으로 읽을 수 있는 데, 이 역시 ‘及伐尺’의 異表記라는 점에서 ‘급벌척’이라는 외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출토문자자료의 발굴과 기존 금석문의 재판독을 통해 ‘급 벌척’이 신라 외위 등급 중의 하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외위의 사례가 가장 풍부한 10개의 「남산신성비」(591년)에서 급벌척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고, 또 문무왕 13∼14년 외위제가 소멸될 무렵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사기』에도 급벌척이라는 등급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급벌척 은 법흥왕∼진흥왕대에 기능했던 초기의 외위제 등급이었다고 생각된다. 「중성리비」,「냉수리비」,「봉평리비」를 비롯해 진흥왕대의 자료로 추론해볼 때, 초기의 외위체계는 干 아래에 一伐, 一尺, 波旦, 阿尺, 沙尺, 及伐尺, 一今智의 등급으로 서열화 되어 있었다. 이러한 등급구성은 ‘干支/一今智’라는 「냉수리비」(501년) 단 계까지 기능했던 지방인 위호체계가 사라지지 않고 퇴행적 잔재로 여전히 남아있 는 상태에서, 법흥왕대의 율령에서 확립된 一伐, 一尺, 波旦, 阿尺, 沙尺, 及伐尺의 새로운 외위체계가 병존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후 一今智는 곧 소멸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사척이나 급벌척 등 최하위의 외위 관등 역시 삼국의 항쟁 이 격화되고 지방인의 군사활동 등 정치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지방인에 대한 국가 적 포상이 폭증하는 외위 관등 사여의 인플레 현상 속에서 진평왕대 이전에 소멸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Ⅰ. 머리말

Ⅱ. ‘及伐尺’의 존재

Ⅲ. 초기 外位體系의 복원

Ⅳ. 外位制의 성립과정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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