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건국세력들은 자신들의 건국이념인 주자주의에 맞춰, 그리고 중국의 제 후국으로서의 정치적 위치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의례를 정비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 왕조까지 지속되던 민간의 단군 숭배를 포함한 제천의례와 단군신화가 자신들의 이념 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된다. 이들은 신화와 의례 사이의 정치적 문화 적 괴리를 조정하기 위한 논의를 상당 시간 지속했고, 그 결과 1403년에 편찬된 『동국 사략』에 처음 보이는 국인추대형 단군신화, 곧 조선형 단군신화를 제작한다. 신인이 내려오자 국인이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는 간략한 신화 서사는 천명론, 민심천심론, 천인합일론 등 유가의 정치 이념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 조선형 단군신화는 1413년 을 전후로 하여 제도화된 평양부의 단군-기자 의례와 조응하면서, 나아가 유가적 교육 과정에서의 신화 읽기와 암송 과정을 거치면서 통해 양반 사대부 계층의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 상식은, 대한제국기와 근대계몽기에 단군에 대한 재의미화 작업, 그리 고 근대적 교육 과정을 통해 조정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라는 공식 문헌이 비조선형 단군신화, 다시 말해 조선 이전부 터 전승되고 있었던 단군신화를 수습해 놓은 것은 민간의 의례와 결합되어 구전되고 있었던 신화적 전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조선 초기는 이 같은 이원적 신화-의례 구조의 출발점이었고, 이는 유가 이념의 필연적 결과였다.
1. 건국시조신화와 의례의 문제
2. 선초에 전승되던 두 계열의 단군신화
3. 선초의 단군 의례와 단군신화의 관계
4.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