會哨는 본래 淸軍이 군사 활동 중에 관용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던 방식이다. 특히 淸代 중기 이후, 사회가 불안해지고 도적이 횡행하면서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청 조정은 종종 정해진 시간에 여러 하급부대를 파견하여 특정지역에 진입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마지막으로 미리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 정보를 교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청대에 행해진 회초 제도이다. 道光 연간에는 이민이 柳條邊 동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전통적 봉금 정책을 보호하기 위해 청 조정은 유조변 동쪽의 순찰 역량을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정부와 협의하였다. 양국의 지방관들은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회초”를 진행하여 정보와 소식을 교환하였다. 이리하여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중국과 조선의 회초 제도가 형성되었다. 中國第一歷史?案館에 소장된 ?案 중에는 중국과 조선의 “회초”에 관한 주비주접이 겨우 30여 건이지만, 기타 당안과 문헌 속 회초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흔하다. 오늘날 우리들이 유조변 동쪽의 개방과정을 분석할 때, 이 당안 문서들을 재조명하면서 일부는 실제적 의의가 있고, 일부는 큰 가치가 없음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