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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조선의 宗系와 倭事를 曲筆한 중국 文獻 - 명·청시대에 간행된 문헌을 중심으로 -

The Distortions on the Royal Lineage and Relationship with Japan in the Chinese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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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왕조 시대에 편찬된 관찬 및 사찬 사서에 조선 태조의 종계문제나 倭事를 기록한 서적이 적지 않다. 다만 그 경우 역사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조선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행 사적들의 오류를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발췌하여 인용하여 서술한 경우이다. 셋째는 조선의 오류 시정의 요구와 황제의 수정이나 개편 지시가 있었음에도 어떤 숨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오랜 기간 수정되지 않고 편찬된 경우도 있다. 명조 사적에서 문제가 된 것은 네 가지 요소였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둘째, 이성계의 弑逆 혹은 찬역을 통한 조선 왕조의 창립, 셋째는 倭事 항목으로 부산이 일본 영토였고 조선이 대마도에 조공을 바쳤다는 점, 넷째, 선조가 시와 술을 즐겨 임란을 자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 종계의 곡필 해결에 신경을 곤두세운 조선은 태종 4년(1404)부터 선조 21년(1588)까지 명 황제에게 주청하여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 조선의 끈질긴 요청은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만력 『大明會典』에서 수정되어 조선에 반포되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종계 문제는 해결을 보았으나 명성 있는 석학들이 엮은 사찬사서에는 여전히 오류가 존재하였다. 『續文獻通考』·『吾學編』·『經世實用編』·『?山別集』·『大政紀』 등은 칙서를 받들어 찬집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여러 官司의 典故가 되기도 하여, 館閣의 유학자들이 이 책을 열람하거나 증거로 삼기도 하여 正史와 다름이 없는 책이었다. 종계에 대한 문제는 『명사』에서 해결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교체된 후인 청 康熙연간(1662~1722)에 鄭元慶(1660~1734)이 편찬한 『二十一史約編』에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조선 철종은 世系를 곡필하고 있는 서적의 수정을 요청하자, 同治帝는 『명사』가 찬수되기 이전에는 시골서당의 글을 엮는 士들이 견문이 적확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하였다. 이 서적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통행되지 않아 개수나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각 省의 學政에게 알려 각 府·州·縣學에 통지하도록 조치하였다. 아울러 조선의 세계 등은 『명사』를 전거로 삼도록 조치하는데 그쳤다.

Ⅰ. 머리말

Ⅱ. 조선 연행사의 변무

Ⅲ. 조선의 곡필 改修 요청과 명조의 조치

Ⅳ. 여타 明·淸代 문헌 사료의 곡필

Ⅵ.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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