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三國志』 東夷傳 夫餘條에 보이는 형벌 관련 기사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3세기 무렵 부여 왕권의 위상과 집권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3세기 무렵 부여에서는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형벌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는 ‘官’으로 표현된 관청과 ‘牢獄’으로 상징되는 형벌기관을 중심으로 운용되었다. 또한 殷 正月에 진행된 祭天行事 迎鼓에서는 刑獄을 결단하는 한편, 囚徒를 풀어주는 국가적 사면이 이루어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 부여 왕권이 형벌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殷 正月에 거행된 迎鼓는 부여의 시조 東明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진행된 제천행사이다. 이때 부여왕은 天神의 혈손을 자임하며 祭天行事이자 새해를 맞이하는 新年儀禮의 주재자로 위치하였다. 즉 하늘의 권위를 빌려 刑獄을 판결하고 죄인을 사면하는 과정을 통해 왕실의 위상을 확인하였던 것으로, 이러한 바탕에는 형벌 체계의 정점에 위치하였던 부여 왕권의 집권력이 강고히 뒷받침되고 있었다. 이밖에 ①2~3세기 부여의 왕위계승 과정에서 적자 계승 원칙이 유지되었으며, ②3세기 후반 국가적 위기 속에서도 단절 없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던 점, 그리고 ③2세기 전반 무렵부터 왕권의 주도 하에 後漢 조정과 직접 교섭이 이루어졌으며, ④2세기 말에는 요동의 公孫氏 세력과 혼인을 통한 세력 연대가 이루어졌던 점 등을 통해 당시 부여 왕권이 대내외적으로 대표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I . 머리말
II . 『三國志』 東夷傳 夫餘條의 刑罰 기사 분석
III . 3세기 부여의 祭天과 왕권의 위상
IV .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