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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등재 학술저널

蔣介石과 李承晩

세 차례 회동의 유래와 의의

이 글은 현대 중국과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인물인 장개석과 이승만이 가졌던 세 차례 만남의 유래와 각 회동이 갖는 의의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세 차례 만남을 단순히 개인차원의 ‘교유’ 정도로 간주하기에는, 두 사람의 정치적 위치가 특별하였다. 두 사람은 上海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기는 하였지만, 장기간 미국에서 활동했던 관계로 이승만은 장개석과 면식이 없었다. 이때는 이승만이 아직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이었던지라, 첫 번째 만남에서 정치 현안이 깊이 있게 논의되지는 않았다. 첫 번째 만남을 전후하여 이승만이 줄기차게 ‘활동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실제 장개석으로부터 지원이 있었다. 鎭海에서 가진 두 번째 만남은 당시 동북아의 정세변화가 반영된 결과였고, 장개석의 적극적인 요청에 의해 만남이 성사되었다. 국공내전이 매우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던 당시, 장개석은 공산세력의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서태평양 연안 반공국가의 연맹체 조직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필리핀을 방문하여 키리노대통령과 합작을 논의하였고, 한국과의 합작을 추진하기 위해 이승만과의 회동을 바랐던 것이다. 진해회담의 결과 장개석과 이승만은 반공연맹체 조직에 뜻을 같이한다는 내용을 담은 연합성명을 발표하였다. 회담기간 장개석은 군사합작과 경제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의 제안은 1950년대 이후 양국 간 활발한 교류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휴전 몇 달 뒤 臺北에서 세 번째 회동이 있었다. 공히 공산세력의 침략을 당하였던 두 나라 영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반공국가들이 참여하는 구역성 반공연맹체 조직에 완전히 뜻을 같이하였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두 사람은 연맹체 조직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다음해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정식 출범하였다. 냉전 초기 아시아·태평양지역 각국이 참여하는 반공연맹체 출범을 촉성하였다는 점에서 세 번째 회동이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하겠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origins of the three meetings between Chiang Kai-shek and Rhee Syng-man, two representative political figures of modern China and Korea, and the significance of each meeting. The two men’s political position was special to dismiss the three encounters as mere ‘communion’ at the individual level. The two first met in Shanghai. Although he was the first presid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Rhee was not acquainted with Chiang because he had been active in the United States for a long time. At this time, since Rhee had not yet been elected president, political issues were not discussed in depth at the first meeting. Before and after the first meeting, Rhee persistently requested support for ‘activities funds’, and there was actually support from Chiang. The second meeting in the Jinhae was the result of reflecting the change in the situation in Northeast Asia at the time, and the meeting was held at the active request of Chiang. At a time when the Civil War was going very unfavorably, Chiang promoted the organization of an alliance of anti-communist countries along the western Pacific coast to counter the spread of communist forces. To this end, he first visited the Philippines and discussed a joint venture with President Kirino, hoping for a meeting with Rhee to promote a joint venture with Korea. As a result of the Jinhae summit, Chiang and Rhee issued a joint statement stating that they agreed to the organization of the anti-communist alliance. During the talks, Chiang emphasized the necessity of China-Korea military cooperation and economic exchange, and his proposal led to the result of active exchanges between the two countries since the 1950s. A few months after the Korean War armistice, the third meeting between the two was held in Taipei. The leaders of both countries, both of whom were invaded by communist forces, fully agreed with the organization of a regional anti-communist alliance in which anti-communist countries in the Asia-Pacific region participated. Using the failures of the past as a mirror, the two discussed specific plans for the organization of an alliance, and as a result, the Asian People’s Anti-Communist League was officially launched the following year. The third meeting has a special meaning in that it promoted the establishment of an anti-communist federation in which countries in the Asia-Pacific region participated in the early days of the Cold War.

Ⅰ. 머리말

Ⅱ. 上海 : 이승만의 정치자금

Ⅲ. 鎭海 : 좌절된 ‘반공연맹’ 결성 시도

Ⅳ. 臺北 :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조직 촉성

Ⅴ.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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